두근두근 Tomorrow

남자 싱글 경기가 끝나면서 돌아온 영웅 러시아의 플루쉔코가 "구채점제라면 내가 이긴 경기"라고 했다지요. 과연 라이사첵의 경기는 신채점제의 성격을 십분 이용한 전략이 있었고 플루쉔코의 경기는 구채점제적 성격이 남아 있었습니다. 두 채점제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스타일의 선수가 유리하며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요?


구채점제에 대한 이해

구채점제는 2004년 여름 완전히 폐지되는데요 소위 6.0 시스템이라고 해서 기술성과 예술성 두 부문에 대하여 6.0 만점으로 0,1 단위로 채점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그간 잘못 알려진 것이 꽤 많습니다.

우선 구채점제는 결과적으로는 상대 평가를 하는 시스템입니다. 점프 하나, 스핀 하나에 점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 프로그램에 대하여 기술 점수 얼마, 예술 점수 얼마를 주는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점수보다 순위가 중요합니다.

즉 9명의 심판은 각 선수에 대해 기술점 + 예술점 해서 총점을 내지만 그 총점의 합으로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마다 선수 총점에 따라 종목별 순위를 부여합니다. 당연히 그러면 동점자가 나올텐데 그 경우는 예술성 점수를 우선으로 합니다.

그 뒤 개별 심판이 부여한 순위를 고려, 과반수가 상위 순위를 점유한 순서로 종목별 순위를 결정합니다. 즉, 선수가 얻은 각 심판의 총점의 합이 아니라 과반수의 1위 표를 얻은 선수가 1위, 그 다음 과반수가 차상위를 얻은 선수가 2위, 3위가 되는 방식이어서 9명 심판 중 5명이 1위로 채점하고 4명은 5위로 채점된 선수가 4명이 1위, 5명이 2위가 된 선수에게 승리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대평가 방식이고 이에 따라 총점이 높지만 순위에 뒤지는 일도 일어납니다.



구채점제의 문제들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 연기 순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너무 앞에 하면 다 잘해도 뒤 선수들을 의식하여 만점에 가까운 점수는 나오지 못한다. (실제로 1984 올림픽에서 브라이언 오서는 쇼트 경기에서 마지막 그룹 첫 순서로 나와 완벽한 경기를 하지만 점수는 전원 5.9였습니다. 6.0 만점을 주면 뒤 선수가 더 잘 하면 그 이상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심판의 주관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A 선수의 연기가 B 선수보다 낫다 라는 평가에 대해 일관된 기준이 없으므로 심판에 대한 로비/친소관계가 순위에 영향을 미친다.

3)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난이도 설정을 하고 연기 결과에 대해 감점을 주는 방식이므로 세부 기술의 정확성 보다는 큰 기술(점프)의 갯수가 중요하다. 그리고 감점의 범위 역시 예를 들면 스텝 아웃의 경우 0.2~0.3 감점이 주어지는데 그 재량이 심판에게 달려 있어 주관적 선호 채점을 피할 수 없다.

4) 예술성 점수의 채점에 명확한 기준이 없고 참고 사항이 있을 뿐이어서 이 부문에 대한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2002 올림픽 스캔들

하지만 이 시스템은 100년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폭발한 것이 2002년 솔트 레이크 올림픽에서 첫 종목인 페어 종목에서 나온 심판의 스캔들입니다. 당시 심판의 한 사람이었던 프랑스의 르 그뉴 씨가 러시아 조에 1위를 주어 러시아 조가 1위 표 5-4로 캐나다 조를 이겼는데 프로그램의 난이도는 러시아 조가 높았지만 눈에 보이는 실수(스텝 아웃)가 있어 구채점제 방식이라면 캐나다 조가 이겼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신채점제 방식이라면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경기가 끝나고 이 심판이 ISU 테크위원장(심판의 선정 및 배치에 절대적 권한을 지닌 임원)인 영국 연맹 회장(당시) 스테이플포드 씨에게 "프랑스 연맹 회장이 아이스 댄스에서의 프랑스 조 우승을 위해 페어 종목에서는 러시아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말한 것인데 이 일이 알려지면서 IOC가 개입, 결국 캐나다 조와 프랑스 조가 공동 금메달을 수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대신 피겨 심판들의 부패와 로비를 방지할 수 있는 새 채점제를 채택하기로 합니다. 이 사건은 사실 매우 복잡하여 제가 블로그에 7부에 걸쳐 연재한 바 있습니다만 이번 글의 주제는 채점제 자체이므로 이 정도롤 설명을 압축하겠습니다.

신채점제가 되며 바뀐 것들

그러면 신채점제가 가져야 하는 요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심판의 주관적 판단을 약화시키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권위를 보호하고 해당 연맹에 대한 개별 심판에 대한 압력을 없애거나 약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 심판의 판정 결과가 전체 성적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뀐 시스템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점수가 아니라 개별 기술에 점수를 주어 각 기술 요소의 획득 점수의 합으로 점수를 준다. 즉, 구채점제가 만점이 있는 상태에서 선수들간의 상대적 연기 결과를 평가한다면 신채점제는 0점에서 시작하여 각 기술 요소에서 취득한 점수를 더해가므로 만점이 없는 경기가 됩니다.


2) 구채점제에서의 예술성 점수가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에 의해 예술성 점수도 프로그램 구성 요소(PCS)라는 이름 하에 5가지 세부 판정 항목을 두게 되는데 스케이팅 기술, 트랜지션(기술 요소와 요소 사이의 연결), 연기, 안무, 음악의 해석 이렇게 나누고 각 부문을 10점 만점으로 0.25 단위로 채점하게 됩니다.


3) 심판의 체계를 2원화하여 테크니컬 패널이 점프의 다운그레이드와 에지 사용의 정당성, 비점프 요소의 등급 설정을 하게 되고 저지(judge)는 각 기술 요소에 대한 가감점(GOE, 수행등급)과 PCS의 채점을 담당한다.


4) 모든 선수가 같은 기준 하에서 평가되어야 하므로 채점에 이용되는 기술의 종류를 표준화하고 항목별 배점을 달리하여 요소별 난이도를 조정한다.


5) 심판에 대한 로비를 줄이기 위해 9명의 저지 중 2명은 컴퓨터로 랜덤으로 선택 점수를 반영하지 않고 나머지 7명 중 최대/최소를 뺀 5명의 평균점에 대하여 평가한다.


6) 심판에 대한 외부에서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각 심판의 채점 결과는 누가 어떤 채점을 했는지 그 국적을 공개하지 않는다.(구채점제에서는 국적별 채점 결과를 공개했음)


신채점제의 장점

1) 선수나 국가의 명성에 의한 주관적 판정이 줄어들어 기술력이 우수한 어린 선수 혹은 비강대국 선수들의 진입이 전보다 쉬워졌다.

- 미국 NBC 방송국이 운영하는 유니버설스포츠 사이트는 2009년 미국 내셔널에서 무명에 가깝던 브랜든 므로즈 선수가 2위를 하자 바로 이 점을 지적했는데요 기술 요소에 대한 채점이 합산제이므로 난이도 높은 기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면 기술 기초점수가 높아져 다른 주관적인 판정 부문에서의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죠.

- 여자 선수의 경우, 주니어에서 뛰던 선수가 시니어로 왔을 때 전보다 쉽게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연아(2006), 아사다 마오(2005), 안도 미키(2004) 선수 등이 모두 주니어 월드를 제패한 뒤 첫 시즌부터 시니어 우승을 차지하는데 전에는 아무래도 관록이랄까 하는 게 있어 그런 일이 꽤 드물었습니다.


2) 선수들의 기술 구사가 전보다 정확해졌다

개별 기술마다 기초 점수가 있고 수행 정도에 따라 가산점/감점을 부여하다 보니 개별 기술의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구채점제에서는 큰 기술 위주다 보니 스핀, 스텝 등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3) 어느 하나만 잘 하는 선수가 아니라 여러 가지에 골고루 능한 토탈 패키지 형의 선수가 유리하다

토탈 패키지라면 역시 김연아 선수입니다만 이번에 남자 싱글 올림픽 챔피언이 된 미국의 라이사첵 선수도 이번에 점프에 큰 강점을 가진 러시아의 플루쉔코 선수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 같은 이유입니다. 모든 요소에서 골고루 점수를 얻어 갔기에 가능했던 승리였고 구채점제 기준이었다면 플루쉔코 선수가 우승했을 것입니다.

또 이 신채점제 초기에 여자 싱글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미쉘 콴 선수와 이리나 슬루츠카야(러시아)의 희비도 여기서 갈리게 되는데 전반적인 기술의 안정성과 활주 스피드에서 앞서던 이리나 선수는 쉽게 적응했지만 미쉘 콴 선수는 부상도 있었지만 신채점제 기술 체계에 맞추는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4) 안무와 연결 동작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프로그램이 내적인 예술성을 갖게 된다.

피겨에서 안무가 갖는 중요성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무 그 자체 보다는 요소와 요소 간의 연결(트랜지션)을 깔끔하게 하면 기술 요소의 수행 등급(GOE)이 높아집니다. 이것을 잘 활용한 선수가 바로 김연아 선수입니다. 또 이것을 가장 창조적으로 보여주는 안무가가 데이빗 윌슨입니다. 이번 시즌 여러 선수가 그것을 따라 하는 듯 했지만 다시 전처럼 기본 안무만 하는 상태로 되돌아갔는데 이는 이처럼 흐름 속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피겨가 바로 '보기엔 쉽고 하기엔 어려운' 피겨랍니다.


신채점제의 허점

하지만 뭐든 다 좋은 제도라는 건 없습니다. 신채점제는 올림픽 판정 스캔들이라는 악재를 맞아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제도이다 보니 여러 가지 단점도 있습니다.


1) 관중들에게 보기 어려운 경기가 되었다

이는 특히 구채점제 시절 피겨가 성행했던 미국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구채점제에서는 6.0 만점에 대해 일부 감점을 해 가면서 보니까 잔 실수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감상해도 되었습니다. 또 상대적인 경기니까 A가 B 보다 잘했군 하는 식으로 구경하면 되는데 신채점제는 20개 정도의 기술 요소에 대한 개별 채점의 합이 들어가니까 관중들에게는 계산이 어려워 졌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팬들처럼 공부해 가며 보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만 이전에 안 하던 것을 하려니 힘들긴 할 겁니다.


2) 기술의 정형화가 창조적 기술을 만드는 것을 막는다는 비판

구채점제에서는 현재 채점의 대상이 되는 6가지 점프 외에도 여러 가지 변형 점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보는 재미가 다양했는데 신채점제에서는 채점 대상이 정해져 있기에 채점 대상이 아닌 새 점프 등을 개발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새 기술이 등장하면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2004년 이후 이것이 활용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3) 심판의 로비와 선호/견제 판정은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비판 - 심판의 채점 결과의 익명성 문제

최근, 즉 2월 초에 미국 다트마우스 대학의 경제학자인 지쩨위츠 씨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교수는 구채점제 시대의 판정과 신채점제 시대의 판정을 비교하여 심판들이 어떤 국적의 선수에게 선호/견제 판정을 하던 관행이 줄어들었는가를 통계적으로 조사했는데 결과는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심판 채점의 익명성에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밝힙니다.


4) 테크니컬 패널 3명에 대한 로비/불합리 판정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다시피 하다

최근 김연아 선수에 대한 특정 테크니컬 패널의 오심이 꾸준히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3명으로 구성되는 테크니컬 패널에서 2명이 손잡으면 애매한 부분에서 특정 선수에게 선호/견제 판정을 하더라도 항의할 수도 그것을 번복시킬 수도 없는 규정상의 허점 때문입니다. 따라서 랜덤으로 혹은 최대/최소로 빠질 지도 모르는 저지에게 로비하기 보다는 2명의 테크니컬 패널에게 로비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는 외국의 기사까지 있었습니다.


5) 저지 채점 2명의 랜덤 제외는 통계적으로 넌센스
저도 통계를 응용하는 전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제도는 간단히 말해 엉터리입니다.

예일 대학의 통계학과 교수인 존 에머슨 박사는 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로 유명한데 2006년 유럽 선수권 여자 싱글에서 2~5위는 누가 채점에서 빠졌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해 뉴욕 타임즈 등 여러 매체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표에 의하면 2~5위는 어느 위치였더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죠. 이 분은 2006 올림픽 때 매 종목 끝날 때 마다 분석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번 올림픽에도 역시 분석을 하고 계십니다. 그에 의하면 이번 올림픽의 페어 종목에서는 메달은 바뀌지 않지만 4위(러시아 조)와 5위(중국 조)는 바뀌었어야 한다는 것이죠. 남자 싱글의 경우는 점수 차이는 줄어들지만 순위는 유지된다고 밝혔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매 종목마다 분석, 같은 결과를 블로그에 제시한 바 있습니다.


채점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

이 말을 많은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채점제가 바뀌면 선수와 코치들은 그에 맞게 훈련 방법도 수행 전략도 바꿉니다. 그런데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 제도 안의 사람이 문제(최근 미쉘 콴이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라는 것이죠. 시카고 트리뷴 지의 유명 피겨 전문 기자 필립 허쉬 씨는 이미 2002년 여름 신채점제 시안이 발표되었을 때 같은 제목의 컬럼을 쓴 바 있습니다.

신채점제의 성립 목적이 심판의 주관성 약화와 로비 근절을 위한 것이었다면 8년이 지난 지금(시행은 6년간) 평가한다면 성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은 정직하게 훈련하지요. 개별 기술의 정확성이 높아진 것, 그리고 어린 선수들이 토털 패키지 형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 등은 미래의 피겨에 분명 긍정적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일부 사람들이죠.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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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좋은글 정말 잘읽고 가요!
    별달리 아는게 없는 저인데도 굉장히 알기쉽고 재밌게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2010/02/22 15:39
  2. 림보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제도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죠... ㅠㅠ
    그래도 신채점제가 있어 연아 선수가 시니어 무대에 쉽게 안착한 거라 생각해요...

    2010/02/22 20:43
  3. 하모니카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적인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플루쉔코는 계속 랜딩이 흔들리고 그래서
    보면서도 아~~ 라이사첵이 일뜽겠구나 했었는데

    2010/02/24 03:47
  4. 뜨거운홍차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어려워서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있지만
    잘 읽었습니다.

    2010/02/24 03:50
  5. 블루마젠타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네요.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하는
    선수들의 연기에 점수를 준다는건....

    2010/02/24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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